모든 것을 아는 2인자의 안타까운 선택

▲ 27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이인원 롯데그룹 정책본부장(부회장)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최측근이자 그룹 내 2인자로 불리는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인원 부회장은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7부능선을 넘어섰던 롯데그룹 수사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은 지난 26일 오전 7시 11분쯤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한 호텔 뒤 야산 산책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곳은 이 부회장이 주말마다 찾아와 머리를 식히곤 했던 곳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은 산책로에 심어져 있는 가로수에 넥타이와 스카프를 연결해 목을 맸으나 넥타이가 끊어지면서 바닥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며, 산책로를 지나던 마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사체에서 롯데그룹 부회장의 명함과 신분증을 확인하고,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지문을 채취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30~40m 떨어진 이 부회장의 차량에서 4장 분량의 유서도 발견해 내용을 조사 중이다. 경찰은 이 부회장의 최근 행적 등을 수사해 사망 경위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오전 9시 30분 횡령·배임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할 예정이었다.

◆수사 일정 차질 불가피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은 갑작스런 사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추석 연휴까지 수사를 잠시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이날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수사 일정의 재검토를 고려하겠다”고 전했다.

호텔 뒤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
유서에서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다”

이 부회장은 43년을 롯데에 몸담은 국내 최장수 최고경영자다. 황각규 롯데그룹 정책본부 운영실장(사장), 소진세 롯데그룹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총괄사장)과 함께 신 회장의 최측근 3인방으로 꼽힌다.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해 1987년 롯데쇼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백화점 상품매입본부 전무와 영업본부장을 역임했다.

2007년 롯데그룹 정책본부장에 오르며 신 회장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지난해 신격호 총괄회장이 지시한 이른바 ‘살생부’ 명단에 이름이 오른 것으로 알려져 확실히 신 회장 측 인물로 각인됐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그룹 2인자로 불리는 만큼 그룹의 주요 결정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보고 이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할 것을 통보한 상태였다.

▲ 롯데그룹 2인자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이 26일 오전 검찰조사 앞두고 양평 산책로에서 자살했다. 사진은 2009년 12월 롯데그룹, 미소금융재단 출범식. 사진=뉴시스

특히 검찰은 이 부회장의 횡령·배임 혐의를 포착하고 관련 부분을 집중 추궁할 예정이었다. 각 계열사가 조성한 비자금이 그룹 정책본부로 흘러들어 갔는지, 정책본부로 흘러들어간 자금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등도 확인할 계획이었다.

검찰은 그간 롯데그룹이 계열사 간 자산 거래 과정에서 부외 자금을 조성했고, 이 과정에 정책본부가 깊숙하게 개입한 것으로 의심하고 관계자들을 연일 소환 조사한 바 있다.

황 사장은 지난 25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으며 지난 15일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바 있는 소 총괄사장도 조만간 피의자 신분으로 재소환될 예정이었다. 검찰은 이 부회장을 포함한 3인방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신 회장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었다.

검찰은 신 회장 등 오너 일가들에 대한 소환 조사까지 마무리 한 뒤 관련자들을 9월 중 일괄 기소한다는 계획이었으나, 핵심 피의자인 이 부회장이 돌연 목숨을 끊음으로써 수사 차질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이 경우 검찰의 수사 마무리 시점 자체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 애초 검찰은 신 회장의 소환 조사 등을 끝으로 9월 중 그룹 비리 관여자들을 일괄 기소할 계획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A4용지 4매(1매는 제목) 분량의 유서를 통해 “먼저 가서 미안하다”,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가족에게 “그동안 앓고 있던 지병을 간병하느라 고생 많았다. 힘들었을 텐데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썼다.

또 롯데 임직원에게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먼저 가서 미안하다.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며 신 회장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시 고개 드는 조기 인사설

이 부회장이 검찰 출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신 회장 가신그룹의 세대교체설과 조기 인사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다른 최측근 노병용 롯데물산 대표는 이미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검찰에 구속됐으며, 황 사장 역시 비자금 조성 관여 혐의로 사법처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 측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재계는 상황이 급박해진 만큼 가신들이 자진 용퇴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28일 롯데그룹과 재계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과 더불어 소 총괄사장, 황 사장, 노 대표 등은 지난해 형제 간 경영권 분쟁 당시 이후 ‘신동빈의 남자들’로 불릴 정도로 신임이 컸다. 이 때문에 비교적 고령임에도 불구, 이들이 당분간 그룹 실세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할 것으로 평가됐다.

▲ 이인월 롯데그룹 부회장. 사진=뉴시스

하지만 이미 노 대표는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와 별개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월 검찰에 구속된 데다 소 총괄사장과 황 사장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까지 남아있어 대대적 인사교체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검찰은 그룹 내 굵직한 현안들을 처리하던 이들 핵심 최고경영자(CEO)들이 비자금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이번 수사에서 칼날을 피해가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들에 대한 검찰 수사는 신 회장에게도 엄청난 타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서 롯데그룹 측은 2017년 정기임원 인사를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시행한다는 11월 인사설과 관련해 “어려운 상황일수록 정상적인 일정과 계획에 따라 인력을 운영하고 지금은 수사에 적극 협조해 나갈 것”이라며 “조기 인사 계획은 없다”며 여러 번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그룹 측은 인사 계획이 없다고 여러 번 밝혔지만 이 부회장의 자살로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면서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외부적 시선 때문에라도 인사 파트에서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어 “신 회장이 그들에 대한 신임은 여전하겠지만 그룹 전체의 이미지 때문에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신 회장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가신그룹들이 자진해서 용퇴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인원 부재에 소진세 총괄사장 역할론 급부상

우선 이번 수사의 핵심 인물로 꼽혔던 소 총괄사장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키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해 경영권 분쟁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 신동빈 회장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대를 나온 소 총괄사장은 2010년부터 롯데슈퍼와 함께 코리아세븐(편의점)의 겸임 대표를 맡으며 취임 초기 52개였던 롯데슈퍼를 350개 이상으로, 2200여개였던 편의점을 7200여개 이상으로 각각 6배, 3배 이상 성장시키며 빼어난 수완을 보였다.

그러다 편의점 갑을 논란이 불거진 2013년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해 2014년 1월 인사 때 롯데슈퍼·코리아세븐 대표에서 대외업무 담당 총괄사장으로 보임이 변경되며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한발 밀려나기도 했다.

검찰, 수사 중단 방안 검토 중
세대교체 임박? 가신그룹 용퇴설

하지만 소 총괄사장은 같은해 불과 7개월 만에 대외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신설된 그룹 정책본부 내에 ‘대외협력단’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이후 홍보·사회적책임·브랜드경영 등을 담당하던 기존 정책본부 커뮤니케이션실 업무뿐만 아니라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의 대외업무 지원을 맡고 있다.

한번 경영 일선에서 물러선 적이 있는 터라 자신이 맡고 있는 롯데그룹의 사회공헌과 이미지 제고 등에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인수합병(M&A) 전문가이자 롯데의 차세대 전문경영인으로 꼽히는 황 사장도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이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1979년 호남석유화학에 입사한 황 사장은 1990년 신동빈 회장이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부임했을 당시 부장으로 신 회장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일본에서 건너올 당시 한국어가 서툴던 신 회장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업무를 보고해 친밀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신 회장이 경영의 큰 줄기를 잡아가며 굵직한 M&A를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엔 M&A를 진두지휘하는 황 사장이 조력자로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또 다른 신동빈의 남자 노 대표는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와 별개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지난 10일 검찰에 구속됐다.

노 대표는 2014년 말 정기인사 때 롯데월드몰 운영과 올 연말 완공 예정인 롯데월드타워 공사를 총괄하는 계열사 롯데물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 대표는 앞서 2007년 롯데마트 대표로 취임한 이후 8년 간 유통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2013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신동빈 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됐을 때도 노 대표가 신 회장 대신 국회에 출두하면서 다시 한 번 ‘역시 최측근’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그룹 서열 최고위급 CEO이자 유통분야 최장수 CEO 중의 한 명인 노 대표를 롯데물산 대표로 임명했던 것은 그동안 제2롯데월드몰의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특히 노 대표는 지난해 경영권 분쟁이 정점에 오를 당시 롯데그룹 사장단을 움직여 신 회장 공개 지지에 나서기도 했다. 노 대표는 나름 성공적으로 롯데월드타워를 마무리 짓고 다시 그룹 핵심으로 복귀할 포부를 다졌겠지만, 가습기 살균제 건으로 앞날에 짙은 먹구름이 낀 것이다.

한편 노 대표는 대구고 9회 동기 동창 소진세 총괄사장과 그룹 내에서 라이벌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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