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손해사정사는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조사와 손해액 및 보험금을 사정하는 전문자격인이다. 이해가 상충되는 보험사와 보험계약자 사이에서 공정성과 독립성을 갖고 일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손해사정사에게는 ‘자기손해사정’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법관의 제척‧기피‧회피를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기손해사정을 금지하는 개념조차 정착되지 못한 채 변칙 운영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손해사정사제도가 도입(1977년)된 지 40년 경과되었지만 보험사들이 ‘자기손해사정’을 통해서 보험사 편향으로 운영하다 보니 보험소비자들이 보험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민원 중 보험 민원이 64%를 차지하고, 보험 민원 중 보험금 산정 및 지급이 손보사 45.9%, 생보사 18.2%를 차지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손해사정사는 고용‧위탁‧독립 손해사정사로 구분되는데, 고용손해사정사와 위탁손해사정사가 전체의 83%를 차지하고, 독립손해사정사는 17%에 불과하다. 고용손해사정사는 보험사 직원이므로 승진하거나 성과급을 더 받으려고 회사에 충성할 수 밖에 없어 공정하고 객관적인 손해사정이 불가능하다. 위탁업체(보험사의 자회사) 손해사정사도 마찬가지다. 수수료를 더 받고 위탁계약을 다시 체결하려면 ‘갑’에 해당하는 모기업(보험사) 눈치를 봐야 하므로 보험사 요구대로 손해사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고용‧위탁 손해사정사들은 모두 보험사 편이고, 보험사 돈벌이를 위해 일하는 용병(傭兵)들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현행 제도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보험금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 해서 보험소비자의 피해를 방지하려고 도입한 제도가 보험소비자를 희생시키고 있으니 잘못 됐다. 이렇 게 된 배경에 ‘자기손해사정’의 불공정, 불합리한 문제를 금융당국이 방치해서 발생된 것이고, 그 중심에 보험사에 유리한 손해사정 법규가 자리잡고 있다. 즉, 보험사에게 자기 손해를 사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 보험업법 시행령 단서조항 때문이다.

동법 시행령 제99조(손해사정사 등의 의무) ③항은 이해관계를 가진 보험계약의 보험사고에 대해 손해사정을 금지하되, 다만 “보험사 또는 보험사가 출자한 손해사정법인의 손해사정사가 소속 보험사 또는 출자한 보험사가 체결한 보험계약의 보험사고에 대한 손해사정은 제외한다”고 규정(2011.1.24) 해서, 보험회사 또는 자회사 손해사정사에게 ‘자기손해사정’을 허용했다. 결국 보험사 편의(보험사가 적정 손해사정사를 확보해야 한다는 명분)를 봐 준 이 조항 때문에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선량한 보험소비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법 제115조(자회사의 소유)에 “보험회사는 금융위원회 승인을 받아 손해사정 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보험사들은 2003년부터 자회사를 통해 손해사정을 할 수 있게 되었 다. 그러나 이 규정은 자회사의 손해사정 업무를 모회사에 종속시켜 보험사에 편향된 사정을 강요하여 제도의 근본을 왜곡시키게 되었다.

최근에 정치권에서 보험업계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보험사가 손해사정 자회사에 일감을 90% 이상 몰아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실제로 따져야 할 것은 손해사정사의 불공정 거래다. 즉, ‘자기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을 위반해서 계약자에게 피해 준 것이 본질이므로 일감 몰아주기가 아니라 보험사의 불공정 거래를 따져야 한다.

보험업계는 “손해사정사 위탁 비중을 낮출 수 있는 대안이 없고, 자회사에 일감을 맡겨야 효율성 이 제고되어 소비자 권익이 침해되지 않으며, 정보 유출도 우려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황당한 주장이다. 자기손해 사정 금지의 개념을 모르쇠하며, 자기손해 사정을 정당화 하려는 꼼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공정성 훼손 대신 효율성을 운운하니 황당하다. 고객 정보 유출 우려라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말처럼 핑계이고 본말이 전도되었다.

금융위는 보험소비자 울리는 손해사정 관련 법규를 조속 개정해야 한다. ① 손해사정사의 자기손해사정 금지를 보험업법에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② 동법 시행령 제99조(손해사정사 등의 의무)의 예외 조항을 삭제하고 ③ 동법 시행령 제59조(자회사의 소유)에서 손해사정 자회사 소유를 삭제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우면 자회사 위탁 금지 및 타회사 위탁을 명시해서 손해사정사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손해사정 결과를 금감원이 상시 모니터링 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쓰지 말라’는 말처럼, 의심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행여 이를 외면 하는 보험사가 있다면 돈벌이 위해 소비자를 계속 희생시키겠다는 의도이므로 문을 닫아야 한다.

손해사정사 1만명 시대에 보험소비자들에게 피해 주는 불공정한 손해사정사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자기 손해 사정’은 불공정 거래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보이므로 차제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적극 나서서 심도 있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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